김동섭 前 SK기술원장(현 SK이노베이션 고문)

김동섭 前 SK기술원장
[에너지신문] 일석 이희승의 딸깍발이라는 글 중에 “걸음을 걸어도 일인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릿느릿 갈지 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 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네 전통 선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산업화로 인해 우리는 ‘빨리빨리’에 의한 성공에 길들어 이를 우리의 DNA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네 깊숙한 곳에서는 이런 여유와 의기, 강직의 미학이 아직 남아 있다.

격변하고 열악한 외적 환경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위기의식과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이 잘 조합돼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왔다. 세계 어느 곳을 보아도 자랑스러울 성과를 이뤄 냈고, 이는 앞으로도 지속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이제 이에 걸맞는 안전의식과 문화 혁신을 더 해야 할 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건사고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안타까운 것은 사고가 마치 나와는 무관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거나 정부 탓 또는 제도나 법규미흡으로 결론짓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그런 상황과 환경에 있다면 과연 얼마나 다르게 행동 했을 것인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행동들이 사고 유발자들과 다를 것이 있는가? 제도나 법규가 얼마나 사고예방에 실효성이 있게 작동 되고 있을까? 법규 남발로 인한 후유증은 없을까? 그보다 먼저 선행돼야 할 것은 없을까?

2000년도 초 미국 쉘에서 근무 할 때의 일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장과 연구소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며 빈도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가 계속됐다. 특히 이 시기는 세계적인 경기도 위축된 상황이라 경비절감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는 상태였고, 직원들의 관심도 분산돼 있었다.

그러나 이때 경영진이 들고 온 해법은 오히려 행동지침이나 규제강화가 아니었다. 의외로 “안전에 대한 인식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는 ‘Safety culture’ 즉 ‘안전 문화 혁신’이란 것이었다.

처음엔 무슨 철학공부 같은 안전의식 변화 프로그램으로만 생각됐다. 그러나 그 큰 전제는 안전은 의도(intention, willing), 행동(behavior) 보다 가치(value)로 존재할 때, 그 실효성을 더욱 발휘한다는 것(safety is held as a value by all employees)과 모든 직원들은 자신들의 안전뿐만 아니라 동료의 안전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치관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서부터 안전에 무관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의식적으로 무관심했던 안전을 의식하고 점차 의도적으로 안전을 점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발전해 무의식 중에서도 안전을 체크하는 행동 양식으로 바뀐다는 것이 바로 안전 문화 혁신의 주된 골자다.

한 예로 우리가 자동차 좌석 벨트를 매는 습관의 변화과정을 10년전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쉘사는 이런 안전 문화 혁신이 큰 성과를 거뒀고, 그 후 지금까지 좋은 안전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한 건의 중대 재해가 발생한 뒤에는 29건의 가벼운 재해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300건의 상처는 없지만 섬뜩한 체험(near miss)이 존재한다는 하인리히 법칙을 상기하며 안전 문화 혁신의 첫 걸음은 실패를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먼저란 생각을 하게 된다.

경제적 풍요와 부, 명예, 권력 추구에서 온 일관적인 가치관과 과시적 명품문화에서 서로다름을 인정하고 상호존중하는 문화로 우리나라가 발전되기를 희망한다.

빨리 빨리와 전통의 여유가 조화된 생활양식으로, 또 내 이웃의 안전과 행복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통해 주위 안전하지 못한 행동을 친절히 지적해주는 active caring 문화가 우리에게도 확산되길 소망한다.

딸깍발이에서 이희승씨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해서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 자기본위로만 약다. 백년대계를 위해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에 현명하다.

엄결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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