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마진 호황 속 전기차·신기후체제로 ‘위기’
배터리·신소재·바이오 등 탈 정유 가속화

[에너지신문] 저유가 속 정유사들의 고공행진이 거침없다. 2014년 하반기 유가급락으로 인한 최악의 적자를 딛고, 정제마진 호황에 힘입어 거대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위기의식은 여전하다. 유가급락의 우려가 상존하고 신기후변화 체제 도래, 전기차 확산 등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알래스카의 여름을 잘 일궈, 체력을 비축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 나선다는 방침이다. 정유사의 각양각생 행보를 들여다 봤다.


-원가 줄이고 고부가 제품 늘리는 정유사-
-고도화 투자·포트폴리오 다각화 눈길-


정제마진 호조에 1분기 실적 사상 최대

저유가 속 정유업계는 사상 최대 수익을 달성했다. 최근 올 1분기 실적을 발표한 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S-OIL은 각각 8848억원, 3252억원, 4914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153%, 86.2%, 106%씩 오른 수치다.

매출은 단가 하락으로 전년동기 대비 20~28% 가량 수익성은 큰 폭으로 개선된 셈이다. 아직 1분기 실적 발표 전인 GS칼텍스까지 더하면 이들 정유 4사의 1분기 영업이익은 2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정유 4사는 지난해에도 총 2조 7401억원의 사상 최대 수준의 영업익을 기록한 바 있다.

과거 2014년 유가급락으로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S-OIL 등 국내 정유 3사가 정유사업에서만 1조원에 가까운 영업손실을 봤음을 상기하면 놀라운 반전이다.

저유가속 실적 대박은 정제마진에 있다. 정제마진이란 정유사가 일정 가격에 들여온 원유를 휘발유나 경유 등 제품으로 만들어 팔 때 발생하는 가격 차이로, 정유사 실적의 가장 중요한 지표다.

역설적이긴 하나 저유가의 장기화가 석유제품 수요를 자극해 정제마진이 크게 치솟았다. 업계는 지난해 정제마진이 손익분기점인 4~5달러의 두배 수준인 8~9달러 이상으로 확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올들어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6달러 안팎의 견조한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는 관측이다.

또한 국내 정유사들의 높은 고도화 비율과 원유도입선 다변화도 실적 개선을 견인했다. 저가의 벙커 C유를 재처리해 휘발유나 등·경유, LPG 등 수익성 있는 경질유 제품들로 만드는 고도화시설을 선제적으로 구축, 원가절감 및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 증대를 통한 이익 증대를 실현했다는 분석이다.

사우디, UAE 등 기존 중동 거래처 외에 멕시코나 이란 등 저가의 원유 도입도 확대하는 추세다. 특히 SK의 경우 이란산 원유 도입을 크게 확대하면서 원가절감을 통한 수익 증대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정유 부문의 선전도 무시할 수 없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의 42.1%가 석유화학과 윤활유 부문에서 얻었다.

S-OIL도 1분기 석유화학 및 윤활유 사업이 전체 수익의 55.3%를 차지했으며, 윤활유 사업 영업이익률은 39.2%까지 치솟았다. 저유가로 역내 신규 증설이 지연되고 있고, 고급 윤활유에 대한 견조한 수요가 이어지면서 마진이 상승하고 있어 2분기에서 호실적을 이어갈 전망이다.


체질 개선 박차, 차입금↓·신용평가↑

호황에도 정유사의 위기감은 여전하다. 유가 급락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재정 확보 및 점유율 다툼으로 산유국들이 감산 대신 증산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유가흐름이 급락하게 되면 재고손실폭이 급증하고, 정제마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친환경 저탄소 시대의 도래도 부담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150여 개국은 기후변화협약 파리협정에 공식 서명으로 신기후체제의 조기 발효가 기대되고 있다. 신기후체제의 강력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의 보급 확대와 더불어 석유제품 소비 감소가 불가피하다.

전기차의 급속한 성장과 보급도 위기요인이다. 정유사가 생산하는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의 20%가 운송용이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2014년 30만대에서 지난해 60만대로 2배나 성장했고, 우리 정부는 각종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보급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정유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전기차의 급증은 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안길 전망이다.

이에 정유업계는 지금의 호황을 체력을 비축할 기회로 활용 중이다. 차입금은 갚고 현금 또는 현금성 자산을 늘려, 재정건정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정유업계의 지난해 연말 합산 순차입금은 10.5조원 수준이다. 5년내 가장 낮은 수준으로 SK이노베이션 3.5조, GS칼텍스 4.3조, 현대오일뱅크 1.9조, S-OIL 0.9조를 기록했다. 전년대비 각각 4.3조, 1.9조, 1.6조, 1.1조 등 총 8.9조원이나 감소했다.

현금이라는 총알을 장전하고, 위기 요인인 차입금은 줄여 혹시 모를 글로벌 시장 변동성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 SK이노베이션 관계자가 증평공장에서 생산된 LBis를 선보이고 있다.

SK, ‘신사업’ 배터리 주력 글로벌 시장 노크

보수적인 재무정책을 운영 중이지만 생존을 위한 투자는 아낌없이 진행하고 있다. 정유4사는 기존 핵심 사업의 역량 강화에 매진하는 모양새다. 다만 사별로 행보에는 차이가 있다.

업계 1위인 SK이노베이션은 고부가제품 생산 확대를 통한 수익 개선과 더불어 신성장동력으로 집중투자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사업 육성에 주력하는 모양새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중국 내 합작법인인 ‘베이징 BESK 테크놀로지’을 통해 성장하고 있으며, 중국내 전기차 배터리 제조 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리튬 2차전지 분리막(LiBS) 사업은 공장 증설도 결정했다. 증평공장 생산라인 2기를 추가로 구축, 2018년 완공 후 연간 총 3억 3000만㎡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출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를 통해 세계 2위 수준인 시장 점유율을 1위로 끌어올린다는 포부다.

타사와 비교해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글로벌 파트너링과 해외 인수·합병(M&A)을 통해 국내외 합작공장을 건설하고 마케팅과 유통을 함께 추진하는 방식이다.

정유사업의 경우 스페인 렙솔, 사우디아라비아 사빅, 중국 시노펙 등과 합작을 통해 글로벌 전진기지를 구축했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등 신흥시장 진출을 가속화할 계획이다. 또 기존 남미와 동남아에 편중됐던 배터리 사업과 석유화학 사업은 중국을 본거지로 삼아 올해 집중 공략할 예정이다.

석유화학사업을 담당하는 자회사 SK종합화학은 아예 올초 본사 기능제품을 중국 상하이로 사실상 이전했다. 포트폴리오를 고부가 제품으로 재편하는 한편, 기술 경쟁력이 있는 글로벌 강소기업 인수, 글로벌 파트너링 방식의 합작 사업 등을 적극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 GS칼텍스 관계자가 바이오부탄올을 연구하고 있다.

GS칼텍스, 바이오·복합소재 ‘R&D’ 앞장

GS칼텍스는 바이오케미칼과 복합소재 분야를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석유제품 품질 향상을 위한 기술 연구를 통해 축적된 기술과 역량을 바탕으로 신소재 상용화 개발에 힘써 신규 시장을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유가 등 외부환경에 따른 변동성이 큰 기존 핵심 사업을 보완하는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GS칼텍스가 특히 주력하고 있는 바이오부탄올은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원이다. 사탕수수대, 옥수수대에서 뽑아내는 연료로, 디젤 등 수송용 연료를 대체하는 것은 물론 잉크 등 다양한 생활용품의 원료로도 쓰인다.

GS칼텍스는 8년여의 연구개발 끝에 바이오부탄올 양산에 필요한 발효-흡착-분리정제 통합공정 기술을 파일럿 규모에서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40건 이상의 국내외 특허를 출원했고, 2014년 8월에는 산업부로부터 NET 신기술인증을 받는 등 기술력을 검증 받았다. 특히 기존 석유계 부탄올 대비 획기적인 원가경쟁력을 확보해 양산시 사업성이 상당할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GS칼텍스는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와 연계해 500억원을 투자해 여수에 바이오부탄올 시범공장을 건설한 상태다. 현재 진행 중인 데모 플랜트 실증 후 직접 사업화와 함께 플랜트 수출, 기술 라이센스 판매 등도 진행할 계획이다.

개발 공정의 설계와 장치 및 부품 제작의 국산화를 위해 기술개발 초기단계부터 중소기업을 참여시키는 등 동반성장을 추구해온 만큼 향후 해외 플랜트 수출 등 사업 확장을 대비해 전후방 중소·벤처기업을 육성하는 협력체계도 구축할 방침이다.

복합수지 사업도 눈에 띈다. GS칼텍스는 지난 2월에는 국내 업체로는 처음으로 멕시코에 복합수지 공장을 설립하는 등 복합수지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국내 정유사 중 복합 수지를 생산하는 곳은 GS칼텍스가 유일하다. 복합수지는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의 부품재료로 사용되는데 최근에는 자동차 시장에서도 수요가 늘고 있어 추가 수익원으로 유망하다.

아울러 기존 정유·석화·윤활유 등 핵심사업 밸류체인 전반에 걸쳐 원가절감과 수익 확보를 위한 설비투자를 추진, 생산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 현대오일뱅크 윤활기유 공장 전경

현대오일뱅크, 고도화시설 더 투자

배터리, 바이오 등 타 업역에 진출하고 있는 선발주자들과 후발주자인 현대오일뱅크·S-OIL은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주력하고 있다.

공정효율화와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확대를 위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보다 정유 외 석화, 윤활유의 비중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특히 현대오일뱅크의 경우 고도화 설비 확대 및 합작사를 통한 사업다각화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39.1%의 높은 고도화비율을 바탕으로 알짜수익을 낸 현대오일뱅크는 고도화시설에 집중 투자한다.

오는 2018년까지 약 5000억원을 투자해 설비 용량을 증설. 고도화비율을 40% 중반대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저유가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고도화시설을 통해 정제마진을 확대, 수익을 증대하겠다는 구상이다.

합작투자를 통한 석유화학 및 윤활기유 부분으로의 사업다각화도 눈에 띈다. 롯데케미칼과 합작해 추진 중인 현대케미칼은 올 하반기 본격적인 상업가동에 나설 예정이다. 혼합자일렌(MX)을 직접 생산해 최근 늘고 있는 자일렌(BTX)의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 수익을 내겠다는 전략이다.

윤활기유 사업을 맡고 있는 현대쉘베이스오일은 지난 2012년 설립, 2014년 상업가동을 개시했다.

지난해 매출액 5687억원, 순이익 311억원의 견조한 실적을 실현했으며, 향후 쉘의 글로벌 유통망을 이용, 연간 1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S-OIL 제2 아로마틱 공장 전경

S-OIL, 5조 투자 ‘종합에너지사’ 거듭

S-OIL은 고부가 석유화학 확대를 위한 신규 프로젝트 건설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할 방침이다. S-OIL은 2018년 가동을 목표로 4조 7890억원을 투자, 정유 석유화학 복합설비인 잔사유 고도화 컴플렉스(Residue Upgrading Complex, RUC)와 올레핀 다운스트림 컴플렉스(Olefin Downstream Complex, ODC) 건설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RUC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남은 잔사유를 다시 한 번 투입해 휘발유나 프로필렌과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추출하는 시설이다. 벙커C유와 같은 저부가가치 제품은 12%에서 4%로 줄어들어 수익성이 높아지고, 석유화학 비중은 확대돼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게 된다.

ODC는 RUC의 공정을 거쳐 나온 프로필렌(올레핀 기초 유분)을 투입해 올레핀 하류 계열 제품인 프로필렌옥사이드(PO)와 폴리프로필렌(PP)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특히 이 시설은 단순히 기존 시설을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동차부터 가전제품,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 등에 적용이 가능한 고부가가치 첨단 소재 생산 능력을 갖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S-OIL은 정유, 윤활유, 석유화학사업이 균형잡힌 사업구조를 형성해 고수익 종합 에너지 회사로 거듭날 전망이다.


짧은 호황, 외풍 대응력 향상 만전

정유업계는 역대급 ‘호황’에도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저가 원유를 도입하고, 공정 최적화를 통해 원가를 절감하는 한편 글로벌 협력을 통한 세계시장 공략, R&D를 통한 신성장동력 발굴, 고부가제품 생산 증대 및 제품군 확대 등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수익구조 창출을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저유가의 장기화가 예상되고 있지만, 급락 혹은 급등의 가능성도 상존한다. 미 원유 재고 감소에 의한 공급과잉 완화, 글로벌 정제설비 증설에 따른 정제마진 감소도 우려도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 디플레이션 우려 등 대내외적으로 경제 불확실성도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이미 석유산업 상류 부문은 공급과잉과 저유가로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다. 글로벌 메이져 기업들의 자산가치는 급락했고, 미 셰일업체도 줄도산하고 있다. 석유화학과 정유산업의 경우 대규모 M&A를 통해 자발적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미국 화학업계 1, 2위를 달리는 글로벌 화학기업 들이 지난해 말 합병에 합의했고, 일본 정유사들 역시 합병을 통해 시장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정유업계는 석유제품 가격 하락에 따른 수요 증가로 호실적을 보이고 있지만 수익 안정성 확보를 위한 선제적 대응의 필요성을 감지한 것으로 보인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정유업계는 위기에 신속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과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비율,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신사업분야 확보가 생존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에너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