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진 한국보일러공업협동조합 전무

최근 몇 년간 산업용보일러 업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국가적인 녹색산업 부흥정책 등으로 고효율의 보일러 제품이 개발되고, 기술력을 인정받은 기업이 그보다 더 큰 기업에 인수돼 경영의 안정을 꾀하는 일이 벌어졌다. 낙후된 기술이라는 이미지에서 벋어나 더 많은 투자와 자금 확보를 위해 주식을 팔고 살 수 있도록 상장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산업용보일러 업계는 더 힘들고 어려워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거의 모든 사업이 그렇지만 특히 산업용보일러업계는 전보다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내수시장의 붕괴, 또 부동산 위축으로 보일러의 수요가 눈에 띄게 줄어든게 지금의 산업용보일러 업계 현실이다.

이 같은 보일러업계의 위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첫 촉발은 잘못된 냉난방시설에 대한 법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992년에 ‘대형 신축건물의 냉난방시설에 냉방과 난방을 겸하는 냉온수기의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건축물의 냉방설비에 대한 설치 및 설계기준’ 고시가 아직도 유효한 상황이다.

이 법은 이전에 냉동기와 보일러를 따로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을 냉온수기로 설치를 의무화하는 바람에 보일러의 수요를 급격히 떨어뜨리는 현상을 가져왔으며 당시 보일러 매출을 30% 이상, 현재 상황으로 바라본다면 50% 이상 떨어뜨리는 효과를 낳게 했다. 일부 보일러사는 90%의 매출 하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매년 다수의 보일러제조사가 경영란을 이겨내지 못해 공장문을 닫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법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이전엔 대형건물의 냉난방시설은 냉동기가 냉방을 담당하고 보일러가 난방을 담당하는 2원화 구조였다. 그런데 당시 동력자원부가 에너지이용합리화를 내세워 건축물의 냉난방설비 설치기준을 가스로 냉난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며 갑자기 냉온수기를 내세우며 난방전용의 보일러를 제외시켜 버렸다.

이 법은 겉으로 난방을 규제하지 않는 듯 하지만 신축건물 대부분이 냉난방설비를 함께 설치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냉방설비만이 아니라 냉난방설비 전체를 규제하도록 했다. 특히 고시내용을 보면 ‘냉방설비는 흡수식 냉동기 또는 냉온수기를 설치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제품명을 명시 했으나 흡수식냉동기만으로는 난방할 수 없기에 사실상 모든 건축물의 냉난방설비를 냉온수기로 설치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냉온수기의 난방기능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보면 문제가 있다. 냉난방설비로 냉온수기를 설치하면 냉방은 되지만 난방은 열효율이 떨어져 고층건물은 일부분 난방이 안 돼 별도의 소형보일러를 설치하는 일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가격도 냉동기와 보일러 별도설치 방식은 냉온수기보다 저렴해 1원화된 냉온수기 사용보다 경제성이 높다.

냉온수기는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제품인데 이 같은 경제성의 한계로 실용화하지 못한 제품이다. 지금은 일본과 한국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나마도 일본은 우리처럼 대형건물에 냉온수기를 쓰도록 규정하지 않고 냉난방설비를 업계 자율에 맡기는 상황이다.

제품 자체만 보더라도 어떤 제품군은 처음엔 효율이 좋다가 몇 년 쓰면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이 빚어지고 또 어떤 제품군은 난방효율이 60%로 고정돼 보일러 열효율 90%를 따르지 못하기도 한다.

여러가지 비효율적인 면이 드러난 이상 이제는 이러한 잘못된 법을 바꿔야 한다. 실수요자가 냉난방설비를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냉온수기 설치 의무화 조항을 변경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특정한 냉난방기를 쓰라고 규정하는 것은 시장원리에도 맞지 않다.

정부가 나서서 보일러의 경제성 조사와 함께 냉온수기와 EHP·GHP 등의 제품에 대해 총체적인 경제성, 타당성, 효율성을 조사하고 시험해 그동안의 냉온수기 중심의 고시가 올바른 정책이었는지 밝혀내야 한다.

국가 정책에 따라 에너지사용 방식을 수시로 바꾸는 바람에 국민은 혼란을 느껴왔다. 그 결과 어떤 에너지의 어떤 제품을 써야 가정 경제는 물론 국가 전체의 에너지 절감책에 맞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역난방, 개별난방, 냉온수기, 산업용 가스보일러 등 각종 에너지기기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사용처별로 국가가 나서서 조사해 국민이 정확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각종 중소기업 진흥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냉온수기와 EHP를 제조하는 회사가 대부분 대기업임을 고려할 때 보일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을 더욱 육성할 수 있는 이 같은 제도 개선책을 포함한 여러 가지 효율적인 중소기업 육성시책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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