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의 경제→다목적 활용’ 중심축 이동
인허가·규제 체계 적기 확보가 필요 조건

[에너지신문] 원자력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에너지원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원자력발전은 원자핵분열 연쇄반응이라는 과학적 발견을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수단으로 발전시킨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학기술적 성과 중 하나이다.

원자력은 ‘불’과 ‘전기’의 발견에 이어 ‘제3의 불’이라 불릴 정도로 인류문명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일반 상식이 됐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1940년대 핵분열 연쇄반응 제어를 통해 에너지 이용 가능성을 입증한 실험용 원자로의 성공으로부터 시작했다.

1950~60년대에는 무한에너지원의 장점을 활용하는 산업 분야인 선박이나 항공기 엔진 등에서 활용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상업용 전력생산을 담당하기 시작한 현재의 대형 원자력발전소에 이르기까지 원자력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왔고, 이와 더불어 원자력 에너지의 에너지 시장 점유율은 꾸준하게 증가해왔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한 상업용 원자력발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처럼 원자력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 공급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따라 기술적 성장을 거듭해 왔으며, 원자력을 이용한 상업 발전(發電)은 규모의 경제에 입각한 원자력발전소의 대형화를 통해 발전단가를 낮추는 성과를 거둬 왔다.

1970년대 수십 MWe 수준에 불과했던 원자로 용량이 최근에는 전기출력 1400MWe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에게 상업용 원자력발전소는 매우 크고 많은 양의 전력을 한꺼번에 생산하는 에너지 공급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원전의 대형화는 효과적인 방사능 관리와 안전설비 운용을 가능케 하고, 수조 원이 소요되는 원전 건설비와 자본비 등 투자비용의 효율화를 통해 발전단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적 전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술 혁신으로 변화되는 ‘규모의 경제’

1980년대 중반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RNL)의 앨빈 와인버그(Alvin M. Weinberg) 박사는 갈수록 대형화되는 원자력발전소 설계에 대한 타당성 연구에서, 원자로의 소형화에 대한 장점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설계 및 건설 방식의 혁신을 통해 작은 규모의 원자로도 경제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합리적 주장을 펼치며 소형원자로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원전의 kWe당 건설비용은 그 용량이 증가할수록 지수 함수적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와 같은 고전적인 ‘규모의 경제’ 논리는 기술의 혁신과 함께 이제 변화돼야 한다.

증기발생기,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 주요기기를 하나의 용기에 일체화하는 기술이 이미 개발됐고, 각각의 핵심 기기를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제작 후 직접 이송해 현장에서 단기간에 설치함으로써 건설공기 단축에 의한 투자비용 조기 회수가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소형원자로의 전체 자본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모듈화 및 기술 표준화 기반의 기술혁신이 비용 상승의 주요 요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경제성과 안전성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전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바로 소형모듈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 SMR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SMR 주목받는 이유는 ‘다목적 활용’

소형모듈원자로는 단순히 기존의 원자력발전소 용량을 그대로 축소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존의 대형 원자로 설계의 복잡한 구성이나 안전성 확보 기술을 소형모듈원자로만의 특화된 기술로 차별화하고 진화시킴으로써 더욱 안전하면서 신뢰성 높고 다양한 열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원자로 개념으로 전개하는 것이 소형모듈원자로의 개발 목표이다.

그렇다면 최근 소형모듈원자로가 주목받는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원자로의 ‘다목적 활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세계 에너지 시장은 단순한 전력생산 외에도 산업적 활용을 위한 공정열 및 열원공급, 그리고 수소경제를 대비한 수소생산 기술 등을 복합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원자력 열원 이용의 유연성(Flexibility) 확보가 중요한 화두가 될 전망이다. 즉, 단순 발전(發電) 기능만을 가진 경직성 전원(電源)으로서의 원전은 다양한 에너지 수요 대응에 더는 적합하지 않으며, 세계적인 탄소중립과 수소경제의 흐름 속에서 태양광·태양열, 풍력 등 재생에너지원과 경쟁하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으로 상생할 수 있도록 원자력의 역할 제고를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특히 최근 탄소세 도입을 계기로 더 값싸고 친환경적인 전력 소비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산업계는 소형모듈원자로가 다양한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 시장 변화가 결국은 기존의 대형 원전에만 집착하지 않고 원자로의 소형화에 관심을 두면서 ‘규모의 경제’에서 ‘다목적 활용’으로 그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모멘텀을 제공하는 것이다.

▲ SMR 조감도(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 SMR 조감도(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석탄→SMR’ 전면대체 검토하는 미국

미래 소형모듈원자로 시장에 대한 기대감 역시 원자력의 변신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SMR 도입 계획을 발표한 캐나다는 SMR 로드맵 보고서를 통해 자국 내 광산 및 오일샌드 채굴지에 다목적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비전력망(Off-grid) 지역의 SMR 수요를 전망했다. 지금은 이들 격·오지 중 대부분이 전기출력 1~30MWe의 디젤 발전기로 열과 전력을 공급하고 있으나, 수급이 어려운 디젤연료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SMR 도입은 지역사회의 안정적 에너지 이용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엔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1990년 대비 50~52%로 정한 바 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 자국 내 수많은 노후 석탄발전소를 SMR로 대체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특히 발전소의 보일러만 원자로로 교체하고 부지 내 설치된 고비용의 발전 및 송배전 설비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SMR 도입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SMR의 안전성 강화를 통해 사고에 대비한 방사선비상계획구역(EPZ)을 발전소 부지경계 이내로 한정하는 기술적 진보가 선행돼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1000배 더 안전한 설계를 통해 해당 요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석탄발전소를 SMR로 완벽히 대체한다면 기술개발 투자비용을 상쇄할 만큼의 시장성이 확보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화 앞서 인허가 체계 선행돼야

소형모듈원자로의 적기 도입을 위해서는 더욱 짜임새 있는 투자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자본비용의 빠른 회수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제는 소형원자로도 민간이 주도하는 일종의 상품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업자가 창의적 기술 혁신을 통해 수요 맞춤형 설계·시공을 추구할 것이며, 따라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와 같이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에너지 제품으로서 수요자의 선택권이 주목받는 새로운 소비문화가 정착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민간분야의 생리를 바탕으로 사업성을 강화한다면 소형모듈원자로 시장은 우리 곁에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시장 형성에 앞서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도전적인 난제도 있다. 대표적인 현안으로는 새로운 원자로에 대한 인허가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미래 에너지 시장 수요는 경수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냉각재를 사용하는 비경수형 원자로를 포함하므로 개발 목적에 따라 인허가 체계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이나 투자 효율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적절한 인허가 및 규제 체계를 적기에 확보하는 것 역시 소형모듈원자로의 성공적 도입을 위해 꼭 필요한 요건임을 주지해야 한다.

“말이 달리기 전에 올라타야”

앞으로의 원자력발전은 ‘규모의 경제’에서 ‘다목적 활용’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으며, 미래 에너지 시장은 이러한 수요 패턴을 증명할 것이다. 따라서 SMR의 성공을 위해서는 앞서 필자가 언급한 필요충분조건이 선제적으로 만족돼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달리는 말에는 절대로 올라탈 수 없다’는 진리이다. 즉, 세계가 소형모듈원자로에 주목하는 이 시기에 우리나라가 확보한 기술 자산을 활용해 세계 시장 선점에 나선다면, 지금까지 원자력 분야가 이룩한 성과에 못지않은 훌륭한 성과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적기 투자의 기회를 놓친다면 시장에서의 낙오는 자명할 것이다. 소형모듈원자로에 전 세계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요즘 ‘말은 달리지 않을 때 올라타야 한다’는 단순한 명제가 우리 원자력 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릴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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